(역사추적)
신라 오만대군을 맞아 처절히 싸운 백제 계백 장군과 오천 결사대의 투혼을 기리는 황산벌 전투 재현 그것은 기울어가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누명과 오역은 시작됐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달빛 아래선 거대한 음모가 진행됐다. 1300여년의 세월 진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려졌던 백제멸망과 의자왕 항복에 관한 충격적인 역사 보고서였다.
★역사추적 의자왕 항복의 충격 보고서★
예식진 묘지명
저는 지금 삼국사기 의자왕 편을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의자왕은 황음, 삼천궁녀, 망국제왕과 같은 치욕적인 수식어를 항상 달고 다녔던 무도한 임금의 대명사였습니다. 헌데 이런 의자왕이 제위 기간 내내 대단히 정렬적인 대내외 통치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군요. 나당연합군에게 허망하게 항복하면서 백제의 멸망을 보고 말았던 이 의자왕이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강력한 왕권강화를 시도했다. 사실 좀 연결이 되지 않는 부분들입니다. 얼마 전 백제의 멸망을 둘러 싼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는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자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의자왕의 최후를 둘러싼 충격적인 역사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중국낙양 황하의 물줄기가 고대 중국의 문명을 이루었던 곳이다. 고대문명의 중심지였던 낙양에는 수천 년에 역사가 간직된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한다. 뜻밖의 유물들이 나타나서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 한 점이 등장했다. 왜 백제 유물이 낙양에 등장했을까? 제작진은 이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 해봤다.
“백제국 유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건 탁본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백제국 유물 들어본 적 있으세요?”
“백제국 들어본 적 없어요.”
“당대의 묘지명이 나왔다는 것도 못 들었어요?”
“당대 묘지명은 아주 많아요.”
“이건 언제 거예요?” / “청나라시대요.”
“그럼 백제국 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아마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곳엔 도굴성 유물들도 있기 때문에 출처나 향방에 대해서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 했던 우리는 그 비를 한 중국학자가 사진으로 찍어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작진은 일단 그 교수를 만나 유물에 향방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서 고대유물을 연구하고 있는 조우쩐화(고고문물연구가) 교수였다. 중국 고대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다. 조우쩐화 교수는 유물의 탁본을 사진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은 두 장으로 된 묘지명이었다. 묘지명은 망자의 무덤에 넣는 금석문이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3품에 고위직은 지낸 사람이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전부 당 왕조의 16위중 하나입니다. 이 16위는 조정의 금위군입니다. 전문적으로 황제와 조정 그리고 수도의 안전을 도모하는 부대의 장수입니다. 황제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묘지명에 백제와 웅천인이란 글자가 눈에 띠었다. 百濟熊川(백제웅천) 즉 웅진 오늘날의 충남 공주 출신이었다. 어떻게 백제인이 당나라에서 고위직을 지냈을까? 유물은 진품일까? 취재 도움 요청에 조우쩐화 교수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보더니 유물소장 기관이 방송에 공개를 꺼린다고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다시 연락하게다고 하였다. 왜 백제 웅진 사람이 이곳에 묻힌 것일까?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며칠 후 다행히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묘지명의 실물을 취재진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방송촬영은 안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설득하기로 하고 급히 묘지명이 있는 낙양 2이공대학으로 갔다. 우린 조심스럽게 묘지명을 촬영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왜냐하면 지금 아직까지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아직 공개를 하자 않아서 제 생각에는 찍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묘지명이 창고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촬영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한국에서 손님이 몇 분 오셨는데 우리 진열실을 보고 싶어 하세요.”
간신히 촬영허락을 받았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이 학교의 탁본 전시실이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문제의 묘지석이 탁자에 올려지는 중이었다. 사진속의 묘지명이었다. 아직 중국에서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지석과 덮게인 개석으로 된 묘지명은 둘 다 글자 한자 파손됨이 없었다. 측면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개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당추문, 지석의 사면엔 십이지상이 마치 종이에 그린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百濟熊川人. 백제 마치 백제 고대인을 보는 느낌이다. 묘지명은 중국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대거 매장됐다. 묘지명의 글씨를 정확히 알기 위해 탁본을 떠보았다. 묘지명은 망자와 함께 바로 묻히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들이 왜곡되지 않고 담겨 있어 어떤 기록물보다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지석에는 빼어난 필체 문장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문장의 내용은 묘지명 특유의 은유적인 표현들로 돼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예식진 할아버지 譽多(예다)와 아버지 思善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유력가문 출신이었고 614년에 태어나서 678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묘지명은 백제 출신 한 장군의 생애를 뛰어 넘는 엄청난 백제사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대당 좌위위대장군, 百濟熊川人, 좌평 집안 예식진은 누구인가?
지금 보시는 이것이 바로 어렵게 입수한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이 되겠습니다. 상당히 정밀하게 만들어졌죠. 원래는 죽은 사람들의 묘지엔 이처럼 묻혀 있었겠죠.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인물 예식진. 이 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인데 당나라에 의해서 중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처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당나라에는 왜 갔던 걸까요. 예식진의 생몰 년대를 보면 서기 614년에 태어나서 672년에 사망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상당부분 그의 생애가 백제의 멸망 시기와 겹쳐지죠.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를 살펴보면 이 예식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660년 11월 1일 당나라의 동도였던 낙양 응천문에선 특별한 행사가 벌어진다. 당 고종은 이곳에서 소정방이 백제에서 잡아온 전쟁포로들을 접수했다. 포로들은 의자왕와 88명의 왕족 및 고위관료 그리고 일만 이천 여명의 백성들이었다. 백제 최고 벼슬인 좌평집안의 출신인 예식진도 이들 포로 중 한 명이었을까? 그 가능성을 왜의 사신 이키노무라치 하카도코(당체류 중이던 왜의 사신)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당나라에 머물다가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그의 목격담을 보자. 의자왕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간성 등 37인, 모두 50여인이 조당에 나갔다.1) 왕족 외의 포로들은 백제 최고위직들이었다. 그렇다면 최고위직인 좌평집안의 예식진도 전쟁포로로 이때 당나라에 끌려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제 고위층 집안이 예씨가 백제 멸망 때까지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는 의자왕 때 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인생무상을 한탄하며 세운 비다.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이 주요 지배층에 성씨였고 당연히 그 성은 역사서나 금석문에 등장한다.
이도학 교수
“종전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그런 가문의 존재가 이 묘지명을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좌평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문의 존재 또 인물들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의아스럽다고 좀 이상하다고 이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 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흑치상치 묘지명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흑치상지 묘지명은 낙양에서 1920년대에 발견돼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흑치상지는 예식진과 같은 시대에 백제 장군으로 좌평 다음 직급인 달솔을 지냈다. 백제 패망 후 당에서 예식진과 비슷한 우무위위대장군은 지냈다. 그런데 흑치상지 묘지명엔 증조부 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중국에서 발견된 당 시대의 묘지명은 선조를 설명할 때 보통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은 그의 선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에 왜 증조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예식진은 웅천 즉 지금의 공주에서 6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략 590년 생 조부는 대략 570년 생 정도가 된다. 조부와 아버지는 무왕 때에 좌평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도학 교수
“예식진 묘지명에 보면 이제 증조부는 기재돼 있지 않고 할아버지 때부터 이제 좌평에 오른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예식진 가문은 할아버지 때 와서 중앙정계에 핵심적인 그런 위치로 부각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예씨 가문은 600년대에 백제 신흥정치 세력이 셈이다. 가문의 역사가 짧더라도 어딘가 예씨 가문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의문의 장군 예식진. 그의 족적을 찾아 예식진 생존 때의 한중일 기록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어디에서도 예식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유일하게 또 다른 예씨를 찾을 수 있었다. 소정방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소정방 전의 내용 중 의자왕이 항복했던 상황을 기록한 대목에 웅전성에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라는 기록2)이 있다.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수도 사비가 아닌 웅진성에 항복한다. 그런데 왜 구지 장군 예식과 같이 항복했다고 기록했을까. 의자왕과 같이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은 누굴까? 잠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한 장군 예식, 웅진성 장군 예식, 웅진 사람 예식진, 대대로 좌평을 지낸 웅진귀족집안 예식진과 의자왕과 함께 웅진에서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의 관계는......
예식진 묘지명을 통해 예식은 예식진과 같은 웅진성의 예씨 집안 장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식은 의자왕과 항복할 때 한 번 등장하고 전혀 보이질 않는다. 1400년 전에 사라진 웅진성 장군 예식과 14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웅진 사람 예식진.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너무나 일치한다. 중국시안의 섬서사범대학. 경북대학교에서 당과 한반도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배근홍 교수는 예식장군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예식과 예식진은 같은 집안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섬서사범대학 역사학과 배근홍 교수
“미스(예식)... 뒷발음 식... 미식(예식) 미스진(예식진)... 미식진. 추정컨대 예식은 당나라에 도착한 뒤에 자기 이름을 쓸 때 중간에 변화가 생겨 예식을 한자 예식진으로 바꾼 겁니다. 지금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두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삼국사기에도 동일인의 이름을 다르게 기록하는 일은 흔히 있다. 용수 또는 용춘, 진순 또는 진춘, 흠춘 또는 흠순.
김영관 청계천문화관 관장/백제사 전공
“그 당시에 한자에 어떤 글자를 쓰느냐는 가차(한자음만 빌려 씀)문제가 있기 때문에 음만 같으면 거의 같은 글자를 쓴다고 보고 한자를 더 쓰느냐 덜 쓰느냐는 표기상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인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당의 정3품 대장군 예식진은 패전국 백제의 옛 예식장군이었다. 그러나 예식진 묘지명은 예식진과 예식의 동일인물이라는 차원을 넘는 백제 마지막 날의 충격 보고서였다. 백제의 예식장군은 어떻게 전쟁포로에서 당나라 대장군이 됐을까?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정3품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 그가 바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함께 했던 웅진의 예식장군이었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식진은 의지왕의 최측근이었던 셈입니다. 헌데 왜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이 아닌 예식이 대장으로 있었던 웅진 그러니까 지금의 공주에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의자왕은 660년 7월 14일 예식 장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의자왕의 친고구려 반당노선은 당나라와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는 20년에 걸친 신라의 파병외교에 맞물려 마침내 당나라에 침공을 초래한다. 당군은 서해를 가로질러 660년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나?당연합군에 전격적인 양동작전은 백제의 방어 대책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칠십 평생을 신라와의 전투로 단련된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문제였다. 나?당연합군은 예측을 뛰어넘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이미 백제의 요충지 탄현을 넘어섰다.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전술은 거점성 점령 후 주변을 평정하고 차근차근 진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의 기본 틀을 깨버렸다.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백제멸망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사비도성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했다. 의자왕은 신라군 없이는 당군이 섣불리 싸우지 않음을 간파하고 결사적으로 돌진해오는 신라군 저지를 위해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황산벌로 급파했다. 직진해오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선 사비로 가는 길목 황산벌에서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벌어야 했다.
나종남 교수 육사군사사학과
“소수의 병력을 가졌던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술은 아마도 성을 하나 택해서 성에 들어가서 수성전을 하면서 장기전을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라가 택한 전략이 수성전에 응하지 않고 곧바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백으로서도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벌판인 평야에 나와서 신라군과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오천결사대의 중요한 임무는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660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황산벌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오만 신라군은 백제 오천 결사대에 철벽방어선에 가로막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오천 결사대의 처절한 투혼은 4전 4승 믿기지 않는 전과를 올렸다. 계백의 오천 결사대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쇠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장한 장면을 남기고 황산벌에 전설이 되었다. 백제군은 사비 남쪽에서 18만 연합군과 최후의 전면전을 벌이지만 정면 승부는 역부족이었다. 일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다. 신라 군부는 비교할 수 없는 연합군의 전투력이었다. 결국 패전 5일째인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그날 밤 사비도성은 더 이상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3)
전선은 웅진의 2차 방어선으로 이동한다. 대규모 나?당연합군을 방어하기엔 평지인 사비도성보다 험준한 웅진성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의자왕이 웅진성을 2차방어선으로 잡은 또 다른 배경엔 웅진의 유력가문 예씨 집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그들도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 때 웅진성을 지키고 있었다. 무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627년(무왕 28년) 군사를 일으켜 군사를 웅진에 주둔했다. 4개월 동안 웅진은 임시 수도였다. 630년에도 무왕은 사비 중건을 위해 웅진성에서 7월까지 머물렀다.4)
이문기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예식진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좌평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좌평으로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던 시기는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시대로 추정을 해볼 수가 있는데 그 무왕시대부터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의지왕은 예씨 귀족에 대한 기대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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