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초 역도산(왼쪽)이 경기를 펼치기 위해 링에 올라서 있다.
한 조를 이룬 역도산의 친구나 다름없었던 모토가 역도산에게 귓속말로 얘기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서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김일이다.
역도산 사진 앞에서 참피언 밸트를 들고 있는 김일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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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들었던 60~70년대 호쾌한 박치기로 거구들을 쓰러뜨리며 전 국민을 흥분시켰던 프로레슬러 김일은 국민적 영웅이었다..요즘처럼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등 변변하게 즐길 거리가 없었던 시절에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끌어 모았던 최고의 인기종목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일이 서 있었다.
프로레슬링이 벌어지는 날이면 만화 가게와 다방은 레슬링 중계를 보려는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다방들은 '오늘 김일 레슬링'이란 간판을 세워놓고 손님을 끌었고, 만화 가게에서는 만화를 보던 꼬마 손님들을 다 내보낸 뒤 다시 TV 손님을 받았다.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호랑이와 등쪽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나타나는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했다.
손에 땀을 쥐고 TV를 보던 사람들은 김일 선수가 상대의 반칙에 피를 흘리면 "박치기" "박치기"를 외쳤고, 김일이 박치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순간 환호했다. 라이벌인 안토니오 이노키, 압둘라 부처와는 매번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으며 혈전을 치렀다.사마귀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돌진해 박치기로 세계의 레슬러들을 쓰러뜨리는 김일은 국민의 영웅이었다.당시 프로레슬링은 축구.권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기 스포츠였고, 김일 선수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에 불과했던 당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준 스포츠 영웅이었다.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당시로서는 장신인 180㎝의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마을 씨름대회를 휘어잡았다. 동네 장사로만 남을 수 없었던 김일은 한 잡지에서 세계프로레슬링 챔피언에 등극하며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1956년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하게 된다.
하지만 밀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한 김일은 곧 경찰에 잡히게 되고 1년간의 형무소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김일은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고 이에 역도산은 보증을 서 김일을 형무소에서 빼내게 되고 1957년 김일을 문하생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후 김일은 지옥훈련을 견디며 박치기 기술을 연마했고 1963년 12월 스승인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픔을 겪으면서도, 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린 12월 8일 다음날인 12월 9일(일본은12월 10일) 미국 LA에서 생애 최초로 WWA(세계레슬링협회) 태그 챔피언 타이틀을 프로레슬링계 데뷔 6년만에 따낸다.역도산은 1963년 12월 15일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김일은 처음에 역도산이 지어준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지만, 스승이 타계한 뒤 다시 한국인 '김일' 선수로 돌아왔다.스승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의 손에 숨진 2년 후인 1965년 7월 신문들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레슬러인 김일이 8년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활동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김일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조국에 왔다고 밝힌다. 65년 8월에는 수재의연금을 내놓았고 곧이어 벌어진 일본 요시노와의 극동헤비급 프로레슬링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국민영웅으로 자리를 굳혔다.이어 66년 일본 도쿄에서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에 올랐고, 이듬해인 67년 '마크 루인'을 꺾고 WWA(World Wrestling Association) 제23대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등극, 최고의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다.1965년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은 80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3천여 회에 걸쳐 국내외 경기를 치르며 세계 타이틀을 20여 차례 방어했다.
하지만 김일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김일은 87년 17세 때 결혼한 아내도 결국 백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레슬링에 입문한 막내 동생(김광식)마저도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으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자신도 줄곧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군대에 보낸 막내 아들마저 불의의 의문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내면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종종 후배들의 프로레슬링이나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왕년에 링에서 호령했던 박치기왕 김일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후반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김일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고 지병은 점점 악화했다.그러던 중 김일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접한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94년 1월 일본에서 국내로 건너온 뒤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으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 머무르면서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 사업에 힘을 쏟아 붇기도 한 김일은 95년 4월 일본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을 갖기도 했다. 국내 은퇴식은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가졌다.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김일은 어김 없이 모습을 나타냈고 30년 이상 된 애제자 이왕표와 수시로 접촉하며 레슬링 발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김일은 특히 남은 여생을 프로레슬링과 관련한 기억을 되돌아 보며 지내기도 했다.
2005년 2월에는 언제 다시 찾을 지 모르는 스승 역도산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고, '레슬링 쇼' 파문으로 41년간 서로 등을 돌리고 지내왔던 '백드롭의명수' 장영철을 방문해 뒤늦게 화해하기도 했다.김일과 함께 60대를 풍미했던 장영철은 김일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여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프로레슬링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2005년 김일은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며 한 때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으나,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왕표씨의 간병 등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회복돼 사회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2006년 9월 10일에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 앞서 특별 시구자로 나서 휠체어를 탄 채 공을 던졌고 이것이 팬들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은퇴 후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기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배들을 격려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김일은 오랜 투병 끝에 2006년 10월 26일 오전 12시17분 눈을 감았다..이때 나이가 77세였다..당뇨에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을 앓았던 고인의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심장 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아들 수안(56)씨와 첫째 딸 애자(61)씨, 둘째 딸 순희(59)씨, 제자인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30여 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르네상스를 연 '박치기의 명수' 김일... 김일 뒤에는 천규덕(왼쪽)과 장영철(오른쪽)이 서 있다.
김일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만들어 국내 프로레슬링 중흥에 앞장서며 장영철과 함께 레슬링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끝까지 후계자를 양성하고 그 맥을 이어온 장본인이다(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라고 말했다는 언론 기사로 프로레슬링의 인기 가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당시 김일과 함께 프로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만든 선수들은 당수의 명인으로 유명한 천규덕(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 알밤까기의 왕 여건부,김일의 사위가 된 남해산, 그외에도 김덕,박성남,박승모,오대균 등이 있다.
김일은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75년 '김일 체육관(후에 정동문화체육관)'을 개관하면서 후계자로 이왕표를 비롯해 후배들을 길러냈다. 재일교포 출신이자 '알밤까기'로 유명했던 여건부, 막내동생인 김광식(교통사고로 사망), 양승희(역발산), 임대수 등이 김일의 제자이다. 이왕표와 양승희 김광식 임대수는 체육관 1기생들이다.또한, 체육관 지원하사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제자로 입문한 백종호는 영화 <반칙왕>의 실제 모델이었다.(백종호는 은행원으로서 30여년전 김일이 김일체육관 건립금을 타은행에 예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 계기였다.프로레슬링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프로레슬러로 링에 나섰다. 동료 레슬러들은 그가 경기도 이천 지점장을 하고 있을 때도 이천까지 와서 은행거래를 했다고 한다. 백종호는 프로레슬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이러한 동료들의 의리였다고 한다)..그리고 2004년 백종호와 함께 은퇴경기를 치른 김도유도 같은 고향출신 제자였다. 프로레슬러들의 산실이 되었던 이 체육관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몰수되었고 정동문화체육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여러 용도로 운영됐지만 2006년 이마저도 헐리고 말았다.
세계 속의 김일
▲ 팔로 다리를 꼰 루 테즈의 기술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김일의 모습
▲ 김일과도 맞붙었던 전설적 레슬러인 철인 루테즈와 함께..김일 선수의 바지에 일본 이름인 大木(오오키)가 보인다
김일 선수와 경기를 치른 외국의 유명 프로레슬러로는 스승 역도산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오,자이언트 바바를 비롯하여 루테즈,마크 루인,프래디 블래시,보보브라질,앞둘라 더 부처 등등이 있다.
1965년 4월 김일은 세계 헤비급 챔피언 철인(鐵人) 루테즈 선수에게도 도전하여 선전했으나, 링 밖에서 날아온 의자에 머리가 찢어져 분패(憤敗)했다..김일이 다 이긴 경기였는데 누군가 고의로 의자를 던져 김일의 머리를 찍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만약 홈링이었던 일본과 한국에서 경기를 치렀다면 김일의 승리가 확실했을 것이다.(미국서 세 경기를 치른 후 김일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결심을 하며 한국과 일본이 국교 수립 발표만 남겨 놓았던 6월 10일 귀국한다. 김일이 귀국한 12일 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됐다)..루테즈는 WWA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95년 4월 2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렸던 김일 은퇴식에는 루 테즈 회장이 휠체어에 앉은 김일을 손수 밀면서 링까지 보조했다..루 테즈 - 김일이 맺어온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레슬러의 우정’은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루테즈는 2002년 4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7년 4월 29일 W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경기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시 김일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 선수는 '슬리퍼 홀드'라는 목(기도) 조르기 기술로 유명한 마크 루인이었다. 마크 루인은 당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던 루테즈를 꺾은 신흥 강자였다. 그러나 그도 김일 선수의 박치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반칙왕'으로 '물어뜯기'가 특기였던 프레디 블래시 선수도 있었다. 그는 WWA 초대 챔피언을 지냈으며 2회에 걸쳐 챔피언을 지냈고 1971년 7월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일 선수와 격전을 치렀다. 당시 시합은 피바다를 방불케 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김일 선수의 2-1 폴승으로 끝났다.
그 외에 '검은 그림자'로 불리던 흑인 거구 보보 브라질 선수가 있었다. 인터내셔널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이 사망한 이후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를 거쳐 챔피언으로 등장한 선수였다. 당시 185㎝, 140㎏의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였으며 한때 역도산과 루테즈도 꺾을정도로 세계를 제패했던 선수였다.
1972년 12월 일본의 히로시마 현립체육관에서 김일은 보보브라질과 대결을 펼친다.인터네셔널 헤비급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의 사망이후 8년 만에 한국인 김일이 도전한 인터내셔날 헤비급 챔피언은 ‘검은 그림자’ 보보 브라질이 가지고 있었다. 초대 챔피언 역도산 이후로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 등의 세계적 스타들이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인터내셔날 챔피언 벨트는 당시 185cm, 140kg의 흑인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 보보 브라질이 쥐고 있던 상황.. 김일은 1차전에서 보보 브라질의 흉기로 얻어 맞아 1승을 내 줬지만 2,3차전에서 강력한 보디 프레스와 새우등꺾기 기술로 브라질을 제압해 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밖에도 김일 선수는 현역시절 3000여회의 시합을 가졌으니 국제무대에서 상대한 세계적인 스타들은 이들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타이거 마스크, 도리 펑크, 니스라우스 즈비스코, 마이크 디비아시, 미스터 아토믹 등 당시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강호들과 맞붙어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노키와 압둘라 부처 경기 장면(좌)..서울 을지병원으로 문병차 찿아온 이노키(우)
(옆의 사진은 김일 선수와 혈전을 자주 벌였던 '압둘라 더 부처'와 선수시절을 회상하며 모션을 취하고 있다..70년대 김일과 네 번 싸워 모두 비긴 앞둘라 더 부처는 김일이 살아있을때 친구처럼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
압둘라 부처는 전성기 시절 몸무게가 200㎏에 육박했으며 레슬러 중 가장 난폭한 레슬러로 손꼽힌다. 1958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 레슬링을 시작했으며 2008년 12월 13일 72세의 나이에 은퇴했다..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약한 프로 경력 50년 차인 베태랑 이였다.
미국 애틀랜타에 거주하며. 미국 16개 지역에서 ‘부처 프렌차이즈’ 음식점,레슬링 전문 케이블 방송국,헬스장,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 레슬링 매니저로도 이름을 내걸고 있다.압둘라 부처의 아내는 한국인 이인자씨 이다.앞둘라 부처는 순복음 안산교회 김원철 목사와 의형제며. 이 교회 안수 목사이기도 하다.
김일과 압둘라 더 부처의 혈전
김일과 자이언트 바바
74년 10월 도쿄 국기관에서 김일과 이노키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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